
나는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를 포스터에서 느낀다.
예고편까지 갈것도 없이 포스터의 첫 느낌으로 영화에 대한 흥미도가 결정되어 버리는 거다.
거기서 흥미가 생겨야 시놉시스까지 읽게 된다.
물론 잘못된 마케팅으로 좋은 영화를 망친 경우도 여럿보았다.
예) 지구를 지켜라, 파주등
얼마전 신하균 배우 포럼에 갔다가 이해영 감독-천하장사 마돈나, 페스티발-이 이런 말을 했다.
페스티발이라는 영화는 실제로 노출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케팅하는데에 섹스라는 표현은 빼고 섹시코메디라고 써달라고 했지만,
완성된 포스터를 보니 자신이 피력한 의견과는 전혀 다른 것이 나와 다시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포스터로 영화의 호불호가 정확히 정해지는 내 경우는 거의 어긋난적이 없다.
<레스트리스> 포스터를 우연히 보자마자 든 생각은 '본다!!!' 였다.
감독이 구스 반 산트라는 것을 안 것은 저 생각이 들고 난 이후였다.
실제로 보고 난 후에는 나의 '포스터 감 신공'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영화는 죽음을 3개월 앞둔 말기암 환자 '에나벨'과 죽음에 집착을 지닌 '에녹'
카미가제 출신의 일본인 유령 '히로시'가 보여주는 에나벨이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엘리펀트> 하나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 때 받은 인상은 화면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총기난사라는 끔찍한 사건과 햇살이 화사한 학교의 풍경은 그 괴리감 만큼 강한 인상의 영화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 추의 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설득력이 없다.
<엘리펀트>의 마지막에 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오면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총기난사가 단순히 정신병자 아이의 우발적인 충동 장애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시에 학생들이 느꼈을 충격과 공포는 상상이상이다.
이것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장기는 <레스트리스>에서도 이어진다.
에나벨과 에녹이 만났을 때 히로시는 말한다.
'왜 저렇게 남자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아파서 삭발을 한 여자아이에게 무심하게
남잔줄 알았다고 하자 엉엉 울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도 난소암에 걸렸다가 회복을 하셨는데 회복 한 이후에도 머리를 민 것에 가장 신경을 쓰셨다.
가발쓰는 것도 싫어하셨고 머리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셨다.
실제로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상처가 될 수 있는 암환자의 모습을
이 영화는 아름다운 배우와 캐릭터로 아름답게 만들어 낸다.
극장을 나갈때 여성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여주인공 머리 너무 예쁘지 않어?'
암환자의 짧은 머리에 동경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게 여주인공이 예뻐서이고
군대에 입대하는 남자 연예인들의 삭발이 사실은 한올한올 짤려진
조금 다른 삭발이듯 연출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삼개월 후의 죽음을 앞두지 않은 에나벨이었다면
그 머리가 그토록 예뻐 보였을지 의문이다.
아름다운 화면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만 잔뜩 모아 좋은 카메라에 좋은 필름으로 찍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스트리스에는 남자아이같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에
모자를 쓰고 멜빵바지를 입고 마치 원래 취향이 그랬다는 듯이 지냈어야하는 에나벨의 삶이 묻어나기에 더 아름답다.
에나벨이 암환자의 머리마저 패션으로 승화시키는 것에 비해
에녹은 대놓고 미남이다. 근데 쫌 이상한 미남이다.
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에나벨과 정 반대의 지점인 나약함에서다.
에녹은 원망한다.
먼저 죽은 부모도 미처 장례조차 보지 못하게 한 이모에게도
그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한다.
끊임없이 타인의 장례식장을 전전 했던 것도
나만큼 슬픈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러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픈 사람들 속에서 맘껏 슬퍼할 수 있도록.
죽은 시신을 빤히 들여다 보는 모습은 '내 부모의 죽은 모습도 이랬을까?'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에녹은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이다.
나약한 내면만큼 한치도 자라지 못했다.
현실과는 담을 쌓은 채 상처를 수습하기 급하다. 다른 것에 집중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그가 곁에 둔 사람은
죽음을 앞둔 에나벨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히로시이다.
에나벨이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그 공포를 견디지 못하는 에녹은
부모의 묘를 망치로 부수며 슬픔을 분노로 치환시킨다.
그에게 히로시는 화를 내며 말한다. 너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이미 죽은 히로시와 곧 죽을 에나벨, 그리고 그들 없이 죽음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야만 하는 에녹.
언뜻 에나벨과 에녹의 사랑이 중심인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연처럼 숨어있지만 사실상 영화전반을 차지하는 히로시가 <레스트리스>의 상징이듯이.
카미카제라는 것은 인간을 모독하는 극단적인 방법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는 것이 목표였으며 나라를 위해 철저히 개인을 희생해야 했다.
예전에 카미카제에 관한 다큐를 보고 소름끼쳤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저럴수가 있었을까.
그 일을 명령한 사람도 선택한 사람도 아직까지 그 희생이 고귀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누구 하나 이해를 못하겠었다.
영화 속의 히로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원망도, 후회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
원망도 후회도 표현하지 않지만 여전히 떠도는 것이다.
에녹이 죽음에 대해 철없는 말들을 토해 낼 때면 화를 낸다.
아마 좀 더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녹과 같은 친구와 게임도 하고 연애에 참견도 하면서.
너무 짧았던 삶이 아쉬워 떠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의 끝부분에 히로시가 좋아하던 소녀에게 쓴 편지는
제국주의에 대한 그 어떤 날카로운 비판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지 않아도
카미카제가 얼마나 슬픈 일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곧 목숨을 잃어야하는 상황에서도 히로시는 순수하게 소녀에게 안녕을 고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죽기도 한다.
이 세사람의 관계는 그들의 연령과도 어느정도는 관계가 있겠지만 -아마도 인물들의 나이가 십대로 추정-
잊고 있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그들은 거창한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
에나벨은 그림을 그리고 히로시와 에녹은 게임을 한다.-그것도 아주 오래된 단순한 게임-
에나벨과 에녹 역시 집 근처나 병원에서 만나 어슬렁 거리거나
실제적인 삶과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새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전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을 나누는 데에는 그정도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낭만을 잃지 않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과 너무 사소해서 기억도 안나는 것들을 아름답게 꾸려내면 되는 것이다.
비록 나는 십대가 아니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볼까 한다.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덧글
여긍정 2011/12/14 21:07 # 답글
실생활에 도움도 되지 않는 새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것, 어쩜 귀여운 사이가 가장 행복한 관계 아닐까? 아님 말고.. 흐흐.
weathergirl 2011/12/17 01:00 #
맞아! 귀여운게 짱이야!잘생긴남자<섹시한 남자<<<<<귀여운 남자야 내 친구는 정반대라고 했지만 ㅋㅋ
2011/12/15 00:5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weathergirl 2011/12/17 00:59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