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스레드_사랑에 관한 깊은 통찰 CiNeMa


영화를 보다보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고 느낄때가 많습니다. 

내용과 흐름이 비슷한데다 사유의 깊이가 '장르'를 핑계삼아 점점 얄팍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얕고 쉽게, 화려하고 빠르게. 

이것이 요즘 영화들이 사용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보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이 훤히 보이고, 어떤 감상도 남겨주지 않는, 

뒤돌아서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런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 합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명작 재개봉 바람은 요즘 영화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영화적인 것에 대한 관객의 보상심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팬텀 스레드>는 오랜만에 만나는 영화같은 영화입니다. 


<팬텀 스레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있어 여러개의 빌딩을 넓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첨탑을 올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든든한 토대를 바탕으로 사건을 하나하나 더해 갑니다. 

탑이 높아질수록 인물들의 감정은 복잡해지고 풍경도 달라집니다. 


이 영화는 굉장히 경제적입니다. 

작은 행동과 표정으로 관객이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팬텀 스레드>의 오프닝을 떠올려보면 주인공 레이놀드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가 그 씬안에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사는 단 하나도 없지만 영화의 주요한 배경과(레이놀드의 집), 인물의 캐릭터(소리없이 주전자의 차를 따르는 레이놀드)를

관객에게 확실히 각인시킵니다.



여자주인공인 알마가 등장하고 그녀의 소음을 못견뎌하는 레이놀드의 모습이 드러날 때 

관객은 영화의 시작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맞다, 저 남자는 여자가 있기 전에는 아주 작은 소리도 없이 차를 따를수 있는 사람이었지.' 


레이놀드와 알마가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단순히 주문을 하고 여자는 그 주문을 받을 뿐이지만 

여자의 빨개진 볼, 시선, 배우의 표정 밑에 무수한 감정들이 담겨있습니다. 

굉장히 섹시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레이놀즈는 드레스를 만들 때 절대로 옷을 입은 여자의 얼굴을 보지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옷만을 향합니다. 

그런 그가 패션쇼를 하는 동안 문 구멍 밖으로 유일하게 '바라본' 사람은 알마였습니다. 

영화는 이야기 속 인물조차도 깨닫고 있지 못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아주 조금씩 힌트를 주는 겁니다. 

사실은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요. 


<팬텀 스레드>는 치정극을 가장한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해 치정으로 치닫는 전개에는 익숙하지만 

위험해 보이는 관계가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뒷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팬텀 스레드>가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것은 이 영화의 반전이자 이야기를 끝맺는 방법입니다. 


레이놀드는 마치 생전 이브 생 로랑을 보는듯 합니다. 

온화하고 우아하지만, 예민하고 인간미가 결여된 , 평생 단 한번의 행복도 누려본적이 없는듯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여인 알마는 그와는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무모하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며 인간적입니다. 

그녀는 그 전까지 레이놀드의 근처를 맴 돌았던 여인들과 다르게 그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마라는 여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광기를 띄어갔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정신병의 징후처럼 보였습니다. 

사랑이란 한 명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길들여져가는 과정입니다. 

여자는 그것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썼지만 레이놀즈가 무방비가 될때마다 조금씩 그의 삶에 균열을 일으켰고 

남자는 그 기이한 시너지에 굴복하고 맙니다.  


<팬텀 스레드>는 굉장히 상징적인 사랑영화입니다. 

문제를 지닌 두 남여가 만나 각자의 불완전함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했을 뿐 이건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놀즈는 옷이 아닌 알마의 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씬은 영화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레이놀드는 기꺼이 알마의 독버섯을 먹으려합니다. 

그들의 결합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이성을 초월한 무언가를 느끼게 합니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이끄는 것.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팬텀 스레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이기도 합니다. 

은퇴야 언제든 번복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를 떠올려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경력에 비해 무척 적은 작품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을 고르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가 은퇴의 이유로 밝힌것이 

'아티스트로써의 사명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인 것으로 보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이 만나는 경우는 의외로 흔치 않은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의 연기인생 후반에 쟁쟁한 감독들을 만나 엄청난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폴 토마스 앤더슨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이상이 없다 싶을 정도의 궁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 루이스 역시 경제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이니까요. 

<팬텀 스레드>에서 그는 세상 핸섬한 나이스 가이와 예민한 강박증환자를 자유자재로 오갑니다. 

마치 <순수의 시대>의 연기처럼 큰 소리를 내는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시선과 표정만으로 관객은 그의 감정상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아주 적은 양의 재료를 한톨도 낭비하지 않고 사용해 만들어낸 화려한 만찬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경제적인 감독과 경제적인 배우의 만남이죠.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이제와서 트로피를 하나 더 받는게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깝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꼭 맞는 배역입니다. 

그가 예전에 한 인터뷰를 본적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로 한창 핫하던 그가 참석한 파티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적극적으로 화답하지 못하던 그의 모습을 이야기하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부끄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 그냥... 시끄러웠어요. 전 시끄러운게 싫어요. 제가 정말로 집중해야 할 일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거든요.' 

<팬텀 스레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그와 가장 닮은 인물을 연기한 영화이자 

늘 그랬듯 최고의 연기를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알마는 레이놀드에게 이런 대사를 건냅니다. 

'당신은 너무 잘생겼어요.'

올해 들어 가장 공감한 대사입니다. 



핑백

덧글

  • 이요 2018/03/27 10:52 # 답글

    전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리뷰 읽고 나니 <팬텀 스레드> 보고 싶어지네요.^^
  • weathergirl 2018/03/28 10:43 #

    감사합니다! 제일 기분좋은 덧글이네요^^ 극장에서 끝나가는거 같던데 한 번 봐보세요! 흥미진진하답니다.
댓글 입력 영역